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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부. 흩어진 사람들
  • 2부. 떠도는 사람들
  • 3부. 살아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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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미지

납북자 가족들이 증언하는 전쟁의 참상과 위험천만했던 피난의 길, 가족의 납북, 이산의 아픔은 보통 사람들이 전쟁에서 겪은 고통의 경험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침해 당한 인권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납북자 가족의 목소리로 듣는 아픈 역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1부. 흩어진 사람들
1부 흩어진 사람들1
1부 흩어진 사람들2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납북된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 생명의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납북으로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설마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겠니. 걱정 말고 자거라"
1950년 6월 25일.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총성에 사람들은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알지 못했다. 북쪽에서 피난민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서울 시민의 일부는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아수라장이 된 피난길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친 가족들은 흩어진 채 헤어졌다.
개전 3일째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교는 폭파되었고, 피난의 때를 놓친 사람들은 완전히 뒤집혀 버린 세상에 내던져 진 채 고립되었다.

  • 1. 피난 가는 가족과 머리 위의 헬기, 1950-1953
  • 2. 흥남부두에 몰려든 피난민, 1950.12.19.
  • 3. 겨울의 피난 행렬, 1951년 추정
  • 4. 미 공군이 서울 남서편의 한강철교 교량을 폭파한 장면, 1950.7.8.
  • 5.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기어 오르는 피난민들, 1950.12.3.
  • 6. 의정부의 피난민 조사소에서 피난민의 짐을 살피는 군인, 1951.2.2.
  • 7. 납북자 임원택과 친구들의 학창시절 사진, 1940년대
  • 8. 납북자 김재봉의 독사진, 광복이후
  • 9. 납북자 최영수의 가족사진, 1950.1.1.
  • 2부. 떠도는 사람들
2부 떠도는 사람들1
2부 떠도는 사람들2
2부 떠도는 사람들2

전쟁에 동원되어 생명을 잃거나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갈 곳 없는 난민이 되거나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남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이러저리 부유(浮游)하며 살 곳을 찾아 떠돌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한 장면들이 매일같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전쟁의 엄청난 폭력성은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시켰다. 평범한 민간인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군인이 되어 직접 전투를 수행하기로 했으며,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피해야 했다. 공중 폭격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무처별적으로 파괴되면서 추위를 막을 집이나 먹고 마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난민 수용소와 같은 임시거처로 인파가 몰려 충분한 구호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을 새도 없이 전쟁터로 내몰린 수많은 이들은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거나 어디로도 갈 수 없는 포로의 몸이 되어 영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2부 떠도는 사람들3
  • 1. 폐허로 변한 서울에서의 천막생활, 1950-1953
  • 2. 1.4후퇴 이후 서울 남대문의 모습, 1951.3.20.
  • 3. 서울역 광장의 고아 남매가 작은 불씨 앞에서 몸을 녹이는 모습, 1950.11.17.
  • 4. 김해 지역의 피난민 캠프, 1950.9.19.
  • 5. 바가지에 담긴 밥으로 온 가족이 식사 중인 모습, 1950-1951
  • 6. 미군 보급품을 팔고 있는 소년, 1951.1.8.
  • 7. 철모와 총을 버려둔 채 고개를 숙인 군인, 1950-1953
  • 8. 전선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는 국군, 1950.7.1.
  • 9. 전사자와 그의 구멍난 철모, 1950-1951
  • 3부. 살아남은 사람들
3부 살아남은 사람들1
3부 살아남은 사람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남편을 잃고,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전쟁의 피해와 성처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이 8월의 밤을 가득 채웠고 나는 죽은 여동생이 가여워서 울고, 아버지가 없어서 울고, 배가 고파서 울었다.
전쟁의 포화가 멈추고 가족을 잃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상실과 상처를 홀로 끌어 안고 삶을 살아내야 했다.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을 반복했던 톱질 전쟁에서 국토는 남쪽 일부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황폐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戰後) 복구의 급선무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났음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수십만 명의 납북자와 국군 포로는 전쟁이 만든 상흔(傷痕)으로 남은 채 해결되지 못한 아픈 역사가 되고야 말았다.

3부 살아남은 사람들3
  • 1. 고아를 안고 있는 딘 헤스 대령과 제주 보육원 원장 황온순, 1950.12.
  • 2. 천에 감싸여 홀로 길가에 남겨진 아이, 1951.1.3.
  • 3. 서울 폭격으로 집을 잃은 고아들이 음식을 구걸하는 모습, 1950.10.29.
  • 4.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행상에 나선 엄마, 1950-1951
  • 5. 불탄 집 앞에서 남편을 잃고 다친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 1950-1951
  • 6.죽은 남편의 시체를 발견하고 울부짖는 아내, 1950년 추정
  • 에필로그
에필로그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
"항상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1948년 12월 10일 UN총회에서는 『세계인원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전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선언문입니다.
선언문에서는 모든 사람은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납북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잊혀져버린 권리가 되었습니다.
가족의 납치라는 단장(斷腸)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포화(砲火)를 피해 끊어진 다리와 얼어붙은 강을 맨 몸으로 건너며 전쟁의 폭력성과 상실감을 온 몸으로 마주해야 했던 납북자 가족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전쟁의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기억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권리.
그 권리는 우리 모두의 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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