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파주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
작성일 | 2023-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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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_박물관_미술관_다시보기_파주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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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파주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 잃어버린 사람들, 기억해야할 이름과 만나는 곳 한자로 납북(拉北)은 ‘끌려갈 납, 북녘 북’이다.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전시관은 제1공간 ‘납북의 배경과 원인’, 제2공간 ‘납북의 전개 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제3공간 ‘귀환의 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아픔’, 제4공간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구성돼 있다. 특별전시관에는 납북자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 1천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건물 중앙을 장식한 소용돌이 형상의 조형물 ‘포토 상들리제’는 전쟁으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간 납북자와 그 가족의 기구한 삶을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납북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46년 7월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 데 대해’라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납북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죠.” 그렇다면 누가 표적이 됐을까?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확보 및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남한 사회의 저명인사이자, 우익인사, 지식인 계층 2만4천여명을 계획적으로 납북합니다. 항공사, 운전사, 목사, 농업연구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기획 납북의 대상이 됐지요.” 김규식?안재홍 선생은 대표적인 납북자로 꼽힌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1881~1950)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백범 김구과 38선을 넘나들었던 사람이다. 일제에게 여덟 번 체포돼 감옥에서 9년을 보내고 해방되는 날 출옥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안재홍(1891~1965)도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김규식, 안재홍 선생처럼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가 아닌 경우 어떻게 납북 대상자를 찾아냈을까? 기념관 관계자가 누렇게 변색된 카드를 가리킨다. “보시는 것처럼 김형관이라는 보고자가 작성한 카드에는 성명, 연령, 성별, 주소는 물론 조사 대상자의 행적과 약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상자 안종성은 보성전문 출신으로 만주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관동군에게 협력했으며 인민위원회에 협조를 하지 않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작은 가죽 주머니와 인장과 배지는 무엇일까? 설명을 보니 서울지방법원 판사 심동구가 사용하던 인장과 배지이다. 나방을 붙인 특이한 노트도 있다. 살펴보니, 수원시 서둔동 농사시험장 연구자로 근무하던 이봉우의 농법 관련 원고이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서 흘린 이별의 눈물 납치인사의 북송은 1950년 7월 중순부터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북송은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이뤄졌다. “그마저도 폭격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걸어야 했다고 해요. 북한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남한 주민을 연행하거나 동원하는 정책을 계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남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 의용군과 노무자로 동원했다가 북으로 끌고 가기도 했지요. 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의 전체규모는 대략 10만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천438명의 이름이 실려 있는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는 1950년 12월1일에 발행한 것인데, 서울 수복 직후 공보처 통계국은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까지 서울에서 발생한 피해 상황을 구별로 조사한 것이다. 당시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올린 ‘6.25사변 피랍인사명부’도 있다. 1952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는 정전회담에서 송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시군구별로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취합해 작성한 최초의 전국단위 명부인데, 총 8만2천959명의 납북자 명단이 수록돼 있다. 세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은 남루한 풍경이 등장한다. 1953년 정전 직후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불의 세계 최빈국이었다. 어머니와 남매만 있고 가장의 자리는 비어 있다. 빈자리에 놓인 밥그릇에서 가장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납북된 하격홍의 결혼사진, 그의 아내 성갑순이 빼곡히 쓴 일기장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손때가 묻은 재봉틀에도 남편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잠을 설쳤을 아내의 한숨과 고단한 사연이 묻어있다. 낡은 함석지붕 아래 오래된 라디오가 놓여 있고, 중년들에게 친숙한 대중가요가 실린 두 개의 앨범이 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가수 조용필이 부른 ‘일편담심 민들레야’란 유행가가 납북자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납북 사실을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한 유행가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라는 대목에 이르면 관람객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히기 마련이다. 납북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 ■ 슬픔을 씻고 화해와 상생의 길로 ‘100만인 서명 진정서’, 납북피해 가족의 구출대회가 열리는 사진에서 피맺힌 가족들의 아픔이 전달된다. “납북자를 구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현재까지 납북자들의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으니 참 안타깝지요.” 1953년에 작성된 ‘휴전협정에 의한 민간인 교환에 관한 건’은 정전 직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납북자 귀환을 논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1954년 3월1일부터 하루에 100명씩 실향사민을 남북으로 귀가시키는 데 합의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향한 인원은 19명의 외국인뿐, 북한은 남한으로의 귀향을 원하는 남한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통보한다. 납북자들의 명패를 모셔놓은 기억의 방에 들어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에 거쳐 납북자 신고를 받아서 납북자로 결정된 4천777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새긴 명패가 가나다순으로 전시돼 있다. 납북이라는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 민족의 숙제다. 주목한 것은 기념관에서 관람객을 대상으로 벌이는 다양한 교육활동이다. ‘1950년, 직업이야기’ ‘1950년, 여름이야기’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분단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달한다. 기념관 마중뜰에 있는 추모비 앞에 선다. “전시납북자와 그 가족의 명예회복과 아픔을 위로하는 기념물입니다. 납북의 길을 상징하는 ‘미아리 고개’를 모티프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 납북자들의 방향은 정북(正北)을 향해 있고, 미아리 고개 아래 돌아오는 귀환자의 발길은 정남(正南)을 향해 있지요. 오랜 그리움으로 다시 이곳에 납북자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을 담은 ‘귀환의 길’은 비극의 역사를 하루 속히 끝내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나와서 평화누리공원을 산책하며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납북자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의 세월을 생각한다. 임진강평화곤돌라를 타고 임진강 너머 북녘을 굽어보며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남북이 싸움을 멈추고 서로 협력해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출처: 경기일보[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6. 파주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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